약해지지마 :: 시바타 도요

10대와 20대 초반엔 2~3년 후의 짧은 미래를 즐거이, 기꺼이 그렸다.
20대 중후반에 들어서서는 중장년의 내 모습을 조금은 길게, 생각해 보게 된다.
아주 가끔은 손주들과 노니는 할머니로서의 삶을 동화처럼 상상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90세 이상.
인생의 극말년(?)에 들어선 모습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본 일은 전혀 없다.
하고 싶지 않았다.
얼굴 가득한 주름이 눈코입을 가리고, 아마도 지병 두세개쯤은 가지고 있을 듯한.
나에게는 절대로 찾아올 것 같지 않은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을 생각해 봐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그렇게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일이고.
나와는 먼 이야기.

# 시바타 도요.

일본에 사는 96세의 할머니가 쓴 짧은 시들이 마음을 울렸다.
마감하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 얼른 읽어 치우고 빌려준 사람에게 돌려줘야지,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폈다가,
차오르는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특히 내 맘을 콕콕 찔렀던 몇 편 소개해 본다.


살아갈 힘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
하루하루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친구에게 걸려온 안부 전화
집까지 찾아와 주는 사람들

제각각 모두
나에게
살아갈 힘을 선물하네

(아흔을 넘겨도 하루하루가 사랑스러울수 있구나)

나1

나이 아흔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하루하루가
보람 있습니다
몸은 여위어
홀쭉해도
눈은 사람의 마음을
보고
귀는 바람의 속삭임을
듣고
입을 열면
"말씀이 좋네요. 야무지네요"
모두가
칭찬을 합니다
그 말이 기뻐
다시 힘을 냅니다

(20대의 나는 하루하루가 보람되는지,,)

답장

바람이 귓가에 찾아와
"이제 슬슬
저세상으로
떠나볼까요?"
간지러운 숨결로 유혹합니다

그러면 나
고개를 저으며 말해요
"조금만 더
여기 있을게
아직 못 다한
일이 남아 있거든"

바람은
곤란한 표정으로
후르르 돌아갑니다

(진정한 생生의 의지란 이런 것)

추억1

아이가
생긴걸
알렸을 때
당신은
"정말? 잘됐다
나 이제부터
더 열심히
일할게"
기뻐하며 말해주었죠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벚꽃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날

(별 단어 없는데도 96년 중 가장 행복했던 날의 감동이 스르르 느껴진다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정점을 찍은 날이어서일까.)

목욕탕에서

목욕탕에
설날 아침 햇살이 들어
창에 맺힌 물방울이
환히 빛나는 아침
예순둘 아들이
썩은 나무 같은 내 몸을
씻어 주네

도우미보다
서툰 손길이지만
지그시
눈을 감으면

"새해를 시작하는 관례로......"
등 뒤에서 흥얼거리는 노래
예전에 내가
너에게 불러주던 노래

(무언가 서글퍼지는 듯한 할머니의 표정이 떠오르는 듯 하다)

외로워지면

외로워질 때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손으로 떠
몇 번이고 얼굴을
적시는 거야

그 온기는
어머니의 따스함

어머니
힘낼게요
대답하며
나는 일어서네

(따사로운 햇살에서 모정을 느끼는 건 만국 공통이구나.
96세 할머니도 어머니에게 독백을 하며 힘을 낸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나 ll

침대 머리맡에
항상 놓아두는 것
작은 라디오, 약봉지
시를 쓰기 위한
노트와 연필
벽에는 달력
날짜 아래
찾아와 주는
도우미의
이름과 시간
빨간 동그라미는
아들 내외가 오는 나립니다
혼자 산 지 열여덟 해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당신 달력 위 빨간 동그라미는 무엇인가요)

선풍기

방향을 바꿔
두드리지 않으면
돌지 않는 선풍기
달그락 달그락
힘에 겨운 소리

고민 끝에 내일
새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사십 년 동안
부드러운 바람 보내 줘 고마워

푹 쉬렴
 
(40년간 함께 한 선풍기가 힘겹게 달그락 댈 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설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어깨 주무르기 이용권

먼지투성이
지갑 속에서
나온 것
  
            아빠 엄마에게
            15분 어깨 주무르기 이용권
            (31년12월까지 쓸 수 있어요)
                                         겐이치

초등학생이던 아들이
갱지를 작게 잘라
선물한 이용권 한 묶음

지금도
쓸 수 있을까

(내가 부모님께 만들어 드린 자유이용권. 부모님은 한번도 쓰신 적이 없다.
이용권을 내기 전에 딸래미가 알아서 다가와 주길 바라셨던 건 아닐까..)



귀뚜라미

깊은 밤 고다쓰 안에서
시를 쓴다
나 사실은
이라고 한 줄 쓰고
눈물이 흘렀다

어딘가에서
귀뚜라미 운다
울보랑은 안 놀아
귀뚤귀뚤 운다
귀뚤귀뚤 귀뚜라미야
내일도 오렴
내일은 웃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게

(나 사실은.. 그 다음은 뭐였나요 할머니)


선생님께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말아요
"오늘은 무슨 요일이죠?"
"9 더하기 9는 얼마예요?"
바보 같은 질문도
사양합니다

"사이죠 야소의 시를
좋아하나요?"
"고이즈미 내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질문이라면
환영합니다

(귀여워)

 
바람과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눈을 감으면
바람과 햇살이
몸은 괜찮아?
마당이라도 잠깐
걷는 게 어때?
살며시
말을 걸어옵니다

힘을 내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하고
영차, 하며
일어섭니다

(맑은 날, 툇마루에 앉았다가 마른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어머니 l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아흔둘 나이가 되어도
어머니가 그리워

노인요양원으로
어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돌아오던 길의 괴롭던 마음

오래오래 딸을 배웅하던
어머니
구름이 몰려오던 하늘
바람에 흔들리던 코스모스
지금도 또렷한
기억


(나도 할머니 계신 요양원을 떠나오는 그 기분이 떠올라 괴롭고 슬퍼졌다. 뭔가 나쁜 코스모스.)


아들에게 ll


엄마가
혹시라도 노망들까
걱정하지 마
오늘은 일요일이지?
너는 겐이치
상냥하고 성급한
내 하나뿐인 아들

아직까지는
기억한단다

자, 가봐 어서
넌 네 할 일을
하렴

(참 현실적이어서 가장 슬펐던 작품. 사무실에서 눈물 참느라 고개 치들고 한참을 있었다)



 

『약해지지마』 시바타 도요 지음, 채숙향 옮김,  지식여행, 2010


산케이 신문 '아침의 시' 코너에 실렸던 시들을 모아 낸 시집.
참 간단하고 동시처럼 쉬워보이지만,
할머니가 60대 아들과 함께 상의하며 지어낸 작품들로
1편당 작고 시간이 일주일 씩은 걸렸다고 함.
하지만 할머니의 인생이 녹아든 이 시집이 나오기 까지 걸린 시간은 사실상 96년 이라는 점.
감히 내가 쉽게 거슬러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시바타 할머니는
여자로서, 딸로서, 어머니로서
각자 참으로 치열하게 한 세기를 사셨을 이 시대의 90대를
너무나 순수하고 담담하게 대변해 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할머니. 그저 노인.
우리 세대가 부양해야 할 '의무'의 존재로 치부하면서
난 참 못됐게도 살고 있다.



# 우리 할머니가 보고싶다.
점점 작아지고 있는
우리 할머니
시바타 할머니보다 열살이나 어린데도
'네 할일 하렴' 이라는 간단한 말도
이제는 내게 못해주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요즈음 창 밖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가을이 되어 한 층 높아지고 파래진, 하늘을 느낄 수 있으신지.
제 얼굴은 못알아 보시더라도,
가을 하늘의 청명함은 알아채실 수 있으시길,
그래서 희미하게나마 미소지으실 수 있으시길,
그런 가을을 보내주시길!
불효손녀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 아래는 하필 오늘 본 94세 할머니의 그림 기사 캡쳐.


by 스윙비틀 | 2012/11/05 00:28 | Poetry Diary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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